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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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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선거와 자유당의 위기 === 1955년 헌법은 직선 대통령과 함께, 대통령 유고 시 그 직을 승계하는 부통령을 따로 선출하도록 했다. 두 선거가 별개로 치러졌기 때문에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올 수 있었다. 1963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두 차례 임기를 마친 다나베 쇼조의 후계자로 하세가와 쇼이치(長谷川 正一)를 내세웠다. 하세가와는 옛 왕가인 하세가와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식민지 시절 청평 총독부 재무국장을 거쳐 공화국 초기 재무장관을 지낸 관료였다. 자유당은 선거를 앞두고 그를 '왕가의 피를 이은 공화국의 지도자'로 내세우는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다. 1948년 정치에서 물러난 왕실의 권위를 여당 후보의 정통성으로 끌어온 것이다. 루이나 국립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제인 다이치[* 북산 이민자 출신.]는 이 시기 자유당과 친여 단체가 조성한 분위기를 '하세가와 숭배 운동'이라 부른다. 유력 야당 후보였던 민주당의 이이누마 아키노리가 선거 운동 도중 병으로 사망하면서 하세가와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남은 야당 후보인 국가민주진보당의 오카다 타츠오는 야권 전체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 하세가와는 504만 표, 오카다는 약 216만 표를 얻었고, 이미 사망한 이이누마를 기리는 추모표도 약 185만 표가 나왔다. 하세가와는 전체 투표의 55.7%를 얻는 데 그쳤고, 투표자의 44.3%가 끝내 그를 찍지 않은 셈이었다. 직전 1959년 선거에서 다나베가 74.6%를 얻었던 자유당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나카무라 마사아키가 자유당의 다카하시 요시후미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3자 구도에서 55.7%를 얻은 것은 무난한 승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이치 교수는 대대적인 선전과 유력 후보의 사망이라는 호재가 겹쳤는데도 투표자의 절반 가까이가 여당 후보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자유당의 체면이 크게 구겨졌다고 평가한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자유당 계열 후보들의 득표를 모두 합쳐도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적어도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었다. 대선 직후인 1963년 8월 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다. 신린시 의회 47석 가운데 40석을 민주당이 차지했고, 자유당은 단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전국 곳곳에 하세가와의 선전 현수막과 초상화가 걸려 있던 와중에 나온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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